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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가수 장미화 나이 일흔 다섯, 백현주 찾아 나선다!…사기 당하고 3년만에 끝난 결혼 생활후 생계형 가수로!

  • 전희연 기자 jejutwn@daum.net​
  • 등록 2020.03.27 20:07:31

[제주교통복지신문=전희연 기자]'TV는 사랑을 싣고'에서 가수 장미화를 조명해 네티즌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안녕하세요', '봄이 오면' 등 수많은 명곡과 파워풀한 가창력, 화려한 무대매너로 56년 째 사랑받고 있는 가수 장미화가 3월 27일 방송되는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한다. 

이날 장미화는 1965년 노래 경연 프로인 KBS '아마추어 톱싱어대회'에서 만나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친언니처럼 보듬어 줬던 백현주를 찾아 나선다.

장미화의 쾌활한 성격과 화려한 전성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장미화가 장밋빛 인생의 주인공일 거라 생각하지만, 가슴 아픈 가정사로 힘든 유년시절을 보내야만 했다는데...

장미화에게는 6명의 언니들이 있었지만,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모두 폐렴으로 떠나보내고 졸지에 무남독녀 외동딸이 됐다고. 게다가, 금은방 운영을 위해 일본을 자주 오갔던 아버지와 6.25 전쟁으로 5살 때 생이별을 하며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는 그녀. 

사춘기 시절 유난히 아버지의 존재를 그리워했던 장미화는 외삼촌 덕에 아버지와 십여 년 만에 재회하게 됐고, 항상 그리움의 존재였던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새로운 살림을 꾸린 뒤였고, 오랜만에 만난 딸을 옆집 아이 보듯 하는 무뚝뚝한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졸지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장미화는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노래를 통해 시련을 이겨내려 했다. 이후 1965년 19살의 나이로 부모님 몰래 KBS '아마추어 톱싱어대회'에 출전했고, 그곳에서 서구적인 외모와 가수 패티김을 닮은 목소리로 눈에 띄었던 백현주를 만났다는데. 장미화가 사회에서 처음 만난 친구이자,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애정과 관심을 주며 장미화를 보듬어주고 매 순간 의지가 되어준 존재였다.

홀어머니 밑에서 아픈 남동생과 살았던 백현주는 장미화와 비슷한 가정사, 노래라는 공통분모로 경연대회가 진행되는 1년 동안 서로 의지하며 누구보다 같한 사이가 됐다. 장미화는 자신에게 무심한 아버지에게 서운함을 느낄 때마다 백현주의 집으로 찾아가 집 앞 개천에서 목이 터져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암울했던 시기를 이겨냈다고.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됐던 KBS '아마추어 톱싱어대회'에서 함께 지낸 1년 간 가족보다 더 애틋했던 두사람이지만, 최종 연말 결선에서 장미화는 대상, 백현주는 2등을 수상했다. 

장미화는 록의 전설 신중현 눈에 띄어 신중현 사단 '애드포' 활동을 시작으로 걸그룹 사운드 '레이디버드'로 해외진출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하지만, 백현주는 아픈 어머니와 동생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고,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활전선에 뛰어들며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두 사람은 55년간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됐다는데. 

과연 장미화는 암울했던 가정사로 방황했던 자신을 붙잡아준 백현주를 만나 고마움을 전할 수 있을지 27일 금요일 저녁 7시 40분 KBS1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46년생으로 올해 나이 일흔 다섯살인 장미화는 1965년 서울중앙방송(지금의 KBS 한국방송공사)이 주최한 가수 발굴 노래자랑 탑 싱어 선발대회로 가수로 데뷔했다.

1970년대, 허스키한 보이스와 화려한 스타일로 당대 여가수들과는 다른 매력을 보여준 가수 장미화는 당시 '안녕하세요'의 열풍을 몰고 오며 최고의 가수로 자리매김 했다.

당시 방송에서 장미화는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할 수 있는 건 노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노래하는 사람하고 살 수 없다고 하더라”며 이혼 뒷 이야기를 고백했다.


이어 그는 “남편의 빚이 100억정도였는데 1993년도부터 제가 갚기 시작했다. 집을 다 주고도 오피스텔도 주고 땅도 주고 다 줬다. 노래 관둘 때까지 30년 부른 값을 다 털어주고도 모자랐다”며 빚을 지게 된 사연을 설명했다.

장미화는 “100억 정도 됐다. 1993년 당시 제가 소유했던 4억원대 주택, 오피스텔, 땅 등 모든 것을 다 줬다. 보증에 대한 것 모든 부분을 다 갚아줬다”고 말했다.

또 그는 “당시 야간 업소 무대에 올랐는데 취객이 ‘너 이혼했냐’라며 막말을 했다. 그 자리에서는 당당하게 대처했지만 집에 오면 서러움이 밀려왔었다. 삶이 역겨웠다”며 고생을 했던 시간을 회상했다.

1946년생으로 올해 나이 일흔 다섯살인 장미화는 1965년 서울중앙방송(지금의 KBS 한국방송공사)이 주최한 가수 발굴 노래자랑 탑 싱어 선발대회로 가수로 데뷔했다.

70년대, 허스키한 보이스와 화려한 스타일로 당대 여가수들과는 다른 매력을 보여준 가수 장미화는 안녕하세요.의 열풍을 몰고 왔던 그녀는 어느덧 데뷔 50주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누구보다 화려하게 빛났던 그녀가 오랜만에 시상식을 찾았다.

한 해 동안 가요계에서 도드라진 활동을 보인 가수들에게 상을 주는 시상식. 세월이 흘러 후배들에게 무대를 내어주는 가요계 대선배가 됐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무대 위에서 다시 빛날 날을 준비하고 있다. 행사와 방송 스케줄이 많지 않은 요즘에는 자신의 히트곡을 만들었던 작곡가에게 노래레슨을 받으며 오랜만에 나올 신곡 준비에 여념이 없다.

연륜이 쌓일 대로 쌓인 베테랑 가수임에도 한창 활동하는 가수들 못지않게 자기관리를 하며 무대에 설 준비를 한다. 예순아홉인 지금, 신인의 마음으로 돌아가 프로필 사진을 남기는 그녀. 전성기 못지않은 열정으로 노래를 놓지 않는 천생 가수다. '왕년의 스타'가 아닌 늘 준비된 '현역 가수'로 살아가는 황혼의 디바를 만났다.

장미화는 "저는 목소리가 안 나오는 순간까지 노래할 거예요. 불러주는 사람이 있는 한. 제 노래를 듣고 '저 여자 아직 안 죽었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괜찮네'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게 더 열심히 하고 노력하는 거죠"라고 말한다.

쾌활하고 씩씩한 현역 가수 장미화. 그녀에게는 사람들이 잘 몰랐던 아픔의 시간이 있었다. 화려했던 전성기에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선택한 결혼. 하지만 행복했던 결혼 생활은 3년 만에 끝이 났다. 이혼과 함께 아들의 양육권을 갖기 위해 전 남편의 빚을 떠안아야 했던 장미화. 이후 가요계로 복귀 했지만 빚을 갚기 위해서 생계형 가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33년 간 홀로 아들을 키우며 아픈 노모의 병수발까지 도맡았던 그녀. 하루 12군데의 야간업소 무대를 오르며 집안의 가장 역할을 자처했다. 장미화가 모진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건 하나뿐인 아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엄마 장미화의 애틋한 모정으로 번듯한 사진작가로 성장한 아들은 그녀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자랑거리다.

“안녕하세요”, “애상”, “어떻게 말할까”, “내 마음은 풍선”, “내 인생 바람에 실어”, “서풍이 부는날”, “봄이오면”, “그 누가뭐래도” 등 히트곡을 남겼다.

'의적홍길동' '아스팔트 위의 여자'등 영화에도 출연해 연기력을 과시한 장미화는, 고령의 나이에도 현재까지 활발히 방송 출연 중이다. 또한 산마식품 대표이사 직을 맡아 사업가로서 활동 중이다.

제주교통복지신문, JEJUT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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