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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구좌읍 게스트하우스 살인사건, 예견된 비극

  • 이영섭 gian55@naver.com
  • 등록 2018.02.14 09:07:18

택시기사 : 제주도 공기 좋죠? 손님, 숙소는 잡으셨어요?

손님 : 아뇨, 어디 좋은데 추천해주실래요?

택시기사 : 혼자 왔어요?

손님 : 네

택시기사 : 아~ 남자 혼자 왔다? 그럼 XXX로 갑시다!


업무를 위해 제주를 찾은 남자는 택시기사의 오해로 인해 남녀 투숙객 간 바베큐 파티 등으로 유명한 바닷가 게스트하우스에 묵게 된다.


그리고 그 남자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으로 운명의 그녀를 만나게 되고, 둘은 제주도 이곳저곳을 함께 여행하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  


소지섭과 김지원이 주연을 맡아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제작된 웹드라마 '좋은날'의 한 장면이다.



소지섭, 김지원 주연의 웹드라마 '좋은날'의 한 장면


 한류스타 소지섭의 매력적인 모습과 (아직 태양의 후예로 유명해지기 전) 김지원의 아름다운 미모를 감상할 수 있는 이 웹드라마로 인해 그 배경이 된 사려니숲 등의 방문객이 부쩍 늘어난 건 유명한 일화다.


이처럼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제주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소개되었던 제주의 게스트하우스가 이제는 악몽의 장소로 변해버렸다.


지난 11일 구좌읍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때문이다.



제주에 혼자 여행온 여성이 행방불명됐다는 신고를 접수한 제주동부경찰서는 일대 탐문수색을 벌인 결과 여성이 머문 게스트하우스 인근 폐가에서 목졸려 숨진 피해자를 발견, 그 유력한 용의자로 게스트하우스 관리자인 한정민(32) 씨를 공개수배했다.


현재 한 씨는 경기도 안양에서 마지막으로 위치가 추적된 후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로, 경찰은 그가 고향인 부산으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해 가장 큰 질타를 받고 있는 것은 경찰의 부실한 초동수사다.


유력한 용의자인 한 씨는 게스트하우스의 소유주가 아닌 관리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2017년 11일 이번에 사건이 발생한 동일 게스트하우스에서 준강간 혐의로 기소되어 제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중이었다.


하지만 피해 여성 가족의 실종신고가 접수된 10일 오후 관리자인 한 씨에게 탐문조사를 한 경찰은 그가 동일 전과가 있는 범죄자라는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모르겠다"는 대답만 듣고 더이상의 조사를 진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한 씨는 경찰의 수사가 본격화되자 제주도를 빠져 나가 경기도를 거쳐 잠적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경찰의 부실한 수사에 대해 질타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이에 앞서 게스트하우스라는 숙박업소 자체가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가 드디어 드러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 발생한 민박업소 주인의 한국인 여성 성폭행 사건을 비롯해 국내외에서 게스트하우스 및 민박 업소의 안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계속되어 왔다.


특히 제주 지역의 경우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 영업이 성행하며 도정에서도 제대로 된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수천개 업소가 운영중이라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도정의 관리소홀만 탓하기에는 게스트하우스가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가 더 문제다.


애초에 게스트하우스는 호스트와 게스트, 주인과 손님 간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공유숙박업소라 할 수 있다.


손님은 게스트하우스 숙박을 예약하며 간단한 전화번호와 이름 정도만 기입하면 저렴하게 숙박이 가능하며, 간혹 예외는 있지만 한 방에 많게는 10여명이 함께 사용하는 도미토리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아무런 정보나 친분도 없는 10여명의 사람들이 한 방을 사용하게 되니 당연히 각 룸에는 제대로 된 잠금장치나 보안장치도 없고, 룸 외에 화장실과 주방 등 대부분의 공간을 함께 사용해야 하기에 크고 작은 범죄 행위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게 현실이다.


올레길과 함께 제주를 대표해온 관광상품, 게스트하우스(해당업소는 본문내용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운영주체인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그 스탭 역시 마찬가지다.


그나마 주인이 직접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의 경우 그 위험성이 덜하지만 상당수 게스트하우스들이 장기 체류객이 위주가 되는 '스탭'들을 이용해 업소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수차례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게스트하우스들 대부분은 이들 스탭은 노동력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루 몇 만원 남짓한 게스트하우스 숙박료를 면제받는 대신 무보수로 게스트하우스 운영을 돕고 있는 스탭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 스탭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신원조회나 이력조회 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


게스트하우스에 손님으로 찾아와 장기간 머물다가 자연스럽게 스탭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별도로 채용을 하는 경우에도 제대로 된 이력서 제출과 면접 등의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호스트와 게스트, 그리고 숙박 시스템까지 모든 것에 제대로 된 체계가 없는 게스트하우스가 아무런 사고 없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는 게 사실 더 놀라운 일이라는 의견도 많다.


심지어 이번 사건이 발생한 게스트하우스의 경우처럼 젊은 남녀 숙박객 간의 바베큐 파티 등 단순 숙박 외 특별한 인연을 기대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은 사고 발생의 위험성이 더 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사건이 벌어진 게스트하우스의 블로그에는 이렇게 숙박객 간의 파티 사진이 소개되어 있다


이번 살인 사건 발생으로 제주 지역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무더기 예약 취소 등이 발생하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올레길 열풍과 함께 성장하며 부실한 시스템과 안전장치를 '상호 신뢰'라는 무기로 버텨온 제주의 게스트하우스 1세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도 모른다.


이미 제주 지역에서는 기존 도미토리 형태의 룸이 아닌 1~2인 규모의 소규모 룸을 갖춘 게스트하우스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제주를 찾은 여행객들이 아무런 의심과 고민 없이 처음 보는 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그 장면은 이제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는 지도 모른다.


남녀를 불문하고 혼자 올레길을 걸으며 게스트하우스에서 낯선 이들과 제주를 이야기하는 것도 더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사건이 제주 관광업계와 도민사회에 준 상처는 더욱 아프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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